국민대학교 졸업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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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신익희(申翼熙)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시 종로구 창성동에 국민대학관을 설립·개교하여 초대 이사장, 학장에 신익희가 취임하였다. 교훈은 이교위가(以校爲家),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1948년 국민대학으로 이름을 바꿨고 1959년 쌍용그룹의 창업자인 실업가 김성곤이 인수하였다. 1971년 현재의 북악 캠퍼스로 이전하였으며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2003년 현재 15개 대학원, 11개 단과대학과 교양과정부, 27개 학부, 17개 학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기관으로 성곡도서관, 전산정보원, 출판부, 강남교육관, 언어교육원 등이 있고,

부설연구소로 중국학연구소, 한국학연구소, 사회과학연구소, 물환경연구소, 마이크로파집적회로연구소, 자동차기술연구소, 환경디자인연구소, 스포츠과학연구소, 삼림과학연구소 등이 있다.

미국의 유타대학교 외에 타이완, 중국, 핀란드의 외국 여러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교수와 학생들 간에 교류하고 있다. 현재 쌍용그룹이 운영하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861-1번지에 있다.
[출처] 국민대학교 [國民大學校, Kookmin University ] | 네이버 백과사전

한 없이 부끄러운 국민대 #이제야  #이제서야
15/01/2025

한 없이 부끄러운 국민대
#이제야 #이제서야

https://news.jtbc.co.kr/article/NB12225386?influxDiv=JTBC&areaDiv=ARTICLE&areaIdx=13국민대학교 민주동문회가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도 높은...
03/12/2024

https://news.jtbc.co.kr/article/NB12225386?influxDiv=JTBC&areaDiv=ARTICLE&areaIdx=13

국민대학교 민주동문회가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도 높은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지난달 30일 발표된 선언문에서 동문회는 "우리의 부끄러움이 큰 만큼 우리의 싸움도 치열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동문회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선거를 통해 부여된 권력을 주가조작, 뇌물수수, 공천개입 등으로 개인의 영달을 위해 남용했다"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어 "거부권으로 노동자와 민중들의 정당한 요구를 억압하고, 그들의 투쟁을 간첩 행위로 몰아가고 한반도 전쟁위기를 조장해 국민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렸다"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윤석열 정권은 더 이상 통치의 자격이 없다"며 "하루라도 빠른 퇴진이 곧 민생이고 평화요, 안전임을 선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동문회는 김건희 여사의 박사 논문 표절 논란에 대해서도 "국민대 동문들은 지금 큰 책임과 부끄러움을 느낀다"며 "김건희를 소위 '여사'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과 그 자리를 이용해 온갖 전횡을 저지를 수 있도록 한 것은 김건희의 박사 논문이었고, 소위 김건희 '동문'의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해 학위를 부여한 학교는 국민대였다"고 했습니다.

동문회는 이어 "논문의 온갖 표절과 허술함이 드러났을 때 대통령의 권력 앞에서 침묵하거나 애써 표절을 정당화한 학교도 국민대였고, 교수들과 우리 동문들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김건희 여사로 인해 국민대의 연구윤리는 땅에 떨어졌다"고 비판했습니다.

동문회는 "그것으로 진정 짓밟힌 것은 해방 후 최초의 민족 사학이란 자긍심으로 지금까지 지켜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이자, 모든 국민대학교 구성원들의 양심과 지성"이라며 "결자해지의 때가 왔다"고 밝혔습니다.

또 "윤석열이 무능과 독선의 길을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라고 한다면 우리 국민대 동문들은 윤석열을 거꾸러뜨릴 큰 바위가 돼 기필코 윤석열 정권을 타도하고 새로운 민주 국가 건설의 선봉에 서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민대 민주동문회는 지난 2022년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 논란 이후 지속적으로 검증을 촉구해 왔습니다.

금손 클라스
27/11/2024

금손 클라스

2022년에도 빨갱이란 단어가 ------------------------------------------■ 이념 없는 빨갱이  배곯기로 가득 찬 이념 '빨갱이'1936년을 기준으로 두고 100이란 수치로 놓고 보았...
20/10/2022

2022년에도 빨갱이란 단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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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 없는 빨갱이
배곯기로 가득 찬 이념 '빨갱이'
1936년을 기준으로 두고 100이란 수치로 놓고 보았을 때, 1944년 1월 소매물가는 212 임금은 210으로 실질임금은 99.05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불과 5년 후인 1948년 1월의 소매 물가는 25,171이고 임금은 18,715로써 실질임금은 21.83으로 추락하였다.
해방 후 3년도 못되어서 실질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의 1/5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1936년 일제 강점기의 100원 이상 고소득 봉급자가 1948년 1월 18,715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생계를 겨우 꾸려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들의 월급은 5천 원이 안 되었다.

이 당시 5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 쌀값이 최소 2,800원이었다고 하니 고소득 봉급자 수입의 절반을 쌀값으로 지불한 것이다. 1947년 자료를 보자면 대학교수의 월급이 2,125원 지출이 2만 2,518원으로, 매달 적자가 2만 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김인식, 「화폐인플레 격화와 민생문제」, 󰡔민성󰡕, 1948.5, 42쪽. - 황남준, 「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425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현상은 비단 광복 후에 찾아온 여파가 아닌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저곡가 정책에 의한 피해였다. 1946년도 당시 쌀의 시장가격이 1078원이고 미군정에서 수납하는 가격이 1184원, 4년 후인 1950년도에는 시장가격 19108원에 수납가격 9620원이었다. 약 두 배 낮은 가격으로 국가 안정과 국민의 의무라는 기준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법처럼 밥을 거두어갔다. 철저히 힘에 의한 기준의 정립이자 해석이었다.

여순사건의 큰 모태에는 이데올로기가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14연대 군인과 당시 부역자로 구분되던 사람들 또는 거주자로 인식되는 제 3의 시선들 모두를 보노라면 그들 대부분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는 아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단지 그들은 배가 고팠고, 배고픔을 달래준다는 말을 따랐을 뿐이다. 기득권 집단의 이익추구 중심의 일을 강행하는 정부보다 생존이 중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국가는 있지도 않은 법으로 법이 있다고 해석하여 국민에게 상처를 냈고, 미군정을 뒤에 업은 당시의 대통령은 아이들의, 가족들의, 국민의 배고픔을 나 몰라라 했다.

제주 4・3 사건은 약 2만 명의 피해자를 냈고, 여순사건은 4・3사건과 같이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4・3처럼 무시무시한 사상자를 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데올로기가 없는 곳에서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행된 학살은 수치화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호남 신문은 1949년 1월 15일을 기준으로 손해액이 99억 1,708 만여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호남신문󰡕, 1948.2.8. - 황남준, 앞의 책, 474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정부의 구호자금은 1억 3,500원에 불과했다.

■ 부역자 심사와 서국민학교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되자, 진압군과 경찰은 10월 27일부터 시민들을 가까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강제집결지로는 서국민학교 외에도 동정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진남관 및 미평과 국동의 넓은 공지로 모이게 하였다.
우익과 경찰은 전 시민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동조자를 심사하였다. 길게 늘어선 인간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따로 분류되었다. 이를 일명 ‘손가락총’이라 부르는데, 일부는 학교 뒤의 구덩이로 끌려가 즉결 총살을 당하였다. 손가락총 분류 대상자는 지까다비를 신고 있는 사람, 총을 멘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27일, 전 시내가 함포사격과 진압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을 때 시민들은 부역자 심사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일부는 즉결 처형으로 죽임을 당했고,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풀려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교도소로 보내지거나 학살되었다.

■ 이념 없는 빨갱이

배곯기로 가득 찬 이념 '빨갱이'

1936년을 기준으로 두고 100이란 수치로 놓고 보았을 때, 1944년 1월 소매물가는 212 임금은 210으로 실질임금은 99.05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불과 5년 후인 1948년 1월의 소매 물가는 25,171이고 임금은 18,715로써 실질임금은 21.83으로 추락하였다 해방 후 3년도 못되어서 실질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의 1/5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1936년 일제 강점기의 100원 이상 고소득 봉급자가 1948년 1월 18,715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생계를 겨우 꾸려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들의 월급은 5천 원이 안 되었다.

이 당시 5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 쌀값이 최소 2,800원이었다고 하니 고소득 봉급자 수입의 절반을 쌀값으로 지불한 것이다. 1947년 자료를 보자면 대학교수의 월급이 2,125원 지출이 2만 2,518원으로, 매달 적자가 2만 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김인식, 「화폐인플레 격화와 민생문제」, 󰡔민성󰡕, 1948.5, 42쪽. - 황남준, 「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425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현상은 비단 광복 후에 찾아온 여파가 아닌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저곡가 정책에 의한 피해였다. 1946년도 당시 쌀의 시장가격이 1078원이고 미군정에서 수납하는 가격이 1184원, 4년 후인 1950년도에는 시장가격 19108원에 수납가격 9620원이었다. 약 두 배 낮은 가격으로 국가 안정과 국민의 의무라는 기준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법처럼 밥을 거두어갔다. 철저히 힘에 의한 기준의 정립이자 해석이었다.

여순사건의 큰 모태에는 이데올로기가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14연대 군인과 당시 부역자로 구분되던 사람들 또는 거주자로 인식되는 제 3의 시선들 모두를 보노라면 그들 대부분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는 아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단지 그들은 배가 고팠고, 배고픔을 달래준다는 말을 따랐을 뿐이다. 기득권 집단의 이익추구 중심의 일을 강행하는 정부보다 생존이 중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국가는 있지도 않은 법으로 법이 있다고 해석하여 국민에게 상처를 냈고, 미군정을 뒤에 업은 당시의 대통령은 아이들의, 가족들의, 국민의 배고픔을 나 몰라라 했다.

제주 4・3 사건은 약 2만 명의 피해자를 냈고, 여순사건은 4・3사건과 같이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4・3처럼 무시무시한 사상자를 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데올로기가 없는 곳에서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행된 학살은 수치화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호남 신문은 1949년 1월 15일을 기준으로 손해액이 99억 1,708 만여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호남신문󰡕, 1948.2.8. - 황남준, 앞의 책, 474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정부의 구호자금은 1억 3,500원에 불과했다.


「고립된 기억을 넘어」고립된 기억을 넘어 ; 여수 순천 사건 답사-구술사 정리 및 역사적 상흔이 남긴 문학의 영향,
전자책
https://www.dropbox.com/s/a8xjpoxm6wg8p0h/%EA%B3%A0%EB%A6%BD%EB%90%9C%20%EA%B8%B0%EC%96%B5%EC%9D%84%20%EB%84%98%EC%96%B4%20%3B%20%EC%97%AC%EC%88%98%20%EC%88%9C%EC%B2%9C%20%EC%82%AC%EA%B1%B4%20%EB%8B%B5%EC%82%AC-%EA%B5%AC%EC%88%A0%EC%82%AC%20%EC%A0%95%EB%A6%AC%20%EB%B0%8F%20%EC%97%AD%EC%82%AC%EC%A0%81%20%EC%83%81%ED%9D%94%EC%9D%B4%20%EB%82%A8%EA%B8%B4%20%EB%AC%B8%ED%95%99%EC%9D%98%20%EC%98%81%ED%96%A5%2C%20%ED%8E%B8%EC%A7%91%EC%9E%A5%20%EC%A1%B0%EC%83%81%ED%98%84.pdf?dl=0

22/08/2022

배움을 전하고 세우는 학교가 정치의 논리에 휩쓸리며 스스로 하류를 자청하는 행태는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이라는 이야기 들이 여러 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국민대 교수 69명 “김건희 논문 검증 불발…학생·동문에 부끄러워”‘국민대학교의 학문적 양심을 생각하는 교수들’이 공개한 설문 내용을 보면 교수들은 김 여사의 논문이 ‘문제없다’고 학교가 결론 내린 것을 두고 “학문...
22/08/2022

국민대 교수 69명 “김건희 논문 검증 불발…학생·동문에 부끄러워”
‘국민대학교의 학문적 양심을 생각하는 교수들’이 공개한 설문 내용을 보면 교수들은 김 여사의 논문이 ‘문제없다’고 학교가 결론 내린 것을 두고 “학문의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판단한 대학당국은 국민대학교를 이끌고 갈 자격이 없다”, “작년 이 문제가 처음 이슈가 되었을 때 정치적 고려 없이 원칙에 따라 처리했어야 한다”, “이번 조사결과는 국민대 구성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앞으로 더 큰 불명예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재조사해야 한다” 등 비판 의견을 내놓았다.
반면 “공정한 표절심사가 이뤄졌을 것이라 믿는다

‘국민대학교의 학문적 양심을 생각하는 교수들’ 성명 “소모적인 논쟁…학교 발전 위해 힘써야” 반론도

22/08/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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