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022
2022년에도 빨갱이란 단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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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념 없는 빨갱이
배곯기로 가득 찬 이념 '빨갱이'
1936년을 기준으로 두고 100이란 수치로 놓고 보았을 때, 1944년 1월 소매물가는 212 임금은 210으로 실질임금은 99.05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불과 5년 후인 1948년 1월의 소매 물가는 25,171이고 임금은 18,715로써 실질임금은 21.83으로 추락하였다.
해방 후 3년도 못되어서 실질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의 1/5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1936년 일제 강점기의 100원 이상 고소득 봉급자가 1948년 1월 18,715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생계를 겨우 꾸려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들의 월급은 5천 원이 안 되었다.
이 당시 5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 쌀값이 최소 2,800원이었다고 하니 고소득 봉급자 수입의 절반을 쌀값으로 지불한 것이다. 1947년 자료를 보자면 대학교수의 월급이 2,125원 지출이 2만 2,518원으로, 매달 적자가 2만 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김인식, 「화폐인플레 격화와 민생문제」, 민성, 1948.5, 42쪽. - 황남준, 「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425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현상은 비단 광복 후에 찾아온 여파가 아닌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저곡가 정책에 의한 피해였다. 1946년도 당시 쌀의 시장가격이 1078원이고 미군정에서 수납하는 가격이 1184원, 4년 후인 1950년도에는 시장가격 19108원에 수납가격 9620원이었다. 약 두 배 낮은 가격으로 국가 안정과 국민의 의무라는 기준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법처럼 밥을 거두어갔다. 철저히 힘에 의한 기준의 정립이자 해석이었다.
여순사건의 큰 모태에는 이데올로기가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14연대 군인과 당시 부역자로 구분되던 사람들 또는 거주자로 인식되는 제 3의 시선들 모두를 보노라면 그들 대부분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는 아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단지 그들은 배가 고팠고, 배고픔을 달래준다는 말을 따랐을 뿐이다. 기득권 집단의 이익추구 중심의 일을 강행하는 정부보다 생존이 중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국가는 있지도 않은 법으로 법이 있다고 해석하여 국민에게 상처를 냈고, 미군정을 뒤에 업은 당시의 대통령은 아이들의, 가족들의, 국민의 배고픔을 나 몰라라 했다.
제주 4・3 사건은 약 2만 명의 피해자를 냈고, 여순사건은 4・3사건과 같이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4・3처럼 무시무시한 사상자를 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데올로기가 없는 곳에서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행된 학살은 수치화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호남 신문은 1949년 1월 15일을 기준으로 손해액이 99억 1,708 만여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호남신문, 1948.2.8. - 황남준, 앞의 책, 474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정부의 구호자금은 1억 3,500원에 불과했다.
■ 부역자 심사와 서국민학교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되자, 진압군과 경찰은 10월 27일부터 시민들을 가까운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하였다. 강제집결지로는 서국민학교 외에도 동정공설시장, 동국민학교, 종산국민학교(현 중앙초등학교), 진남관 및 미평과 국동의 넓은 공지로 모이게 하였다.
우익과 경찰은 전 시민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동조자를 심사하였다. 길게 늘어선 인간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따로 분류되었다. 이를 일명 ‘손가락총’이라 부르는데, 일부는 학교 뒤의 구덩이로 끌려가 즉결 총살을 당하였다. 손가락총 분류 대상자는 지까다비를 신고 있는 사람, 총을 멘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27일, 전 시내가 함포사격과 진압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을 때 시민들은 부역자 심사에 발이 묶여 있었다. 일부는 즉결 처형으로 죽임을 당했고,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들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풀려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교도소로 보내지거나 학살되었다.
■ 이념 없는 빨갱이
배곯기로 가득 찬 이념 '빨갱이'
1936년을 기준으로 두고 100이란 수치로 놓고 보았을 때, 1944년 1월 소매물가는 212 임금은 210으로 실질임금은 99.05를 나타내었다. 하지만 불과 5년 후인 1948년 1월의 소매 물가는 25,171이고 임금은 18,715로써 실질임금은 21.83으로 추락하였다 해방 후 3년도 못되어서 실질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의 1/5 이하로 떨어진 것이다. 1936년 일제 강점기의 100원 이상 고소득 봉급자가 1948년 1월 18,715원을 받는다고 하여도 생계를 겨우 꾸려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이들의 월급은 5천 원이 안 되었다.
이 당시 5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 쌀값이 최소 2,800원이었다고 하니 고소득 봉급자 수입의 절반을 쌀값으로 지불한 것이다. 1947년 자료를 보자면 대학교수의 월급이 2,125원 지출이 2만 2,518원으로, 매달 적자가 2만 원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김인식, 「화폐인플레 격화와 민생문제」, 민성, 1948.5, 42쪽. - 황남준, 「전남지방정치와 여순사건」, 해방전후사의 인식(3), 한길사, 425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현상은 비단 광복 후에 찾아온 여파가 아닌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과 저곡가 정책에 의한 피해였다. 1946년도 당시 쌀의 시장가격이 1078원이고 미군정에서 수납하는 가격이 1184원, 4년 후인 1950년도에는 시장가격 19108원에 수납가격 9620원이었다. 약 두 배 낮은 가격으로 국가 안정과 국민의 의무라는 기준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법처럼 밥을 거두어갔다. 철저히 힘에 의한 기준의 정립이자 해석이었다.
여순사건의 큰 모태에는 이데올로기가 있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14연대 군인과 당시 부역자로 구분되던 사람들 또는 거주자로 인식되는 제 3의 시선들 모두를 보노라면 그들 대부분이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는 아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단지 그들은 배가 고팠고, 배고픔을 달래준다는 말을 따랐을 뿐이다. 기득권 집단의 이익추구 중심의 일을 강행하는 정부보다 생존이 중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국가는 있지도 않은 법으로 법이 있다고 해석하여 국민에게 상처를 냈고, 미군정을 뒤에 업은 당시의 대통령은 아이들의, 가족들의, 국민의 배고픔을 나 몰라라 했다.
제주 4・3 사건은 약 2만 명의 피해자를 냈고, 여순사건은 4・3사건과 같이 조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4・3처럼 무시무시한 사상자를 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데올로기가 없는 곳에서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자행된 학살은 수치화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호남 신문은 1949년 1월 15일을 기준으로 손해액이 99억 1,708 만여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호남신문, 1948.2.8. - 황남준, 앞의 책, 474쪽에서 재인용.
하지만 정부의 구호자금은 1억 3,500원에 불과했다.
「고립된 기억을 넘어」고립된 기억을 넘어 ; 여수 순천 사건 답사-구술사 정리 및 역사적 상흔이 남긴 문학의 영향,
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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