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2017
지난 10월 28일에 발표되었던 저희 수원신학교 총학생회의 시국선언문과 관련한 글이 『가톨릭평론』이라는 잡지(7호)에 수록되었습니다.
│
이글은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였던 양두영 부제(전임 총학생회 부학생장)가 “수원신학교의 시국선언이 이뤄지기까지의 과정과, 선언문 전후의 신학생들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 소개해달라”는 『가톨릭평론』의 요청을 받고 부제수품(12월초) 이전에 (학생처장 신부님의 허락 하에) 기고했던 글이라고 합니다.
│
│
전문수록에 앞서 소개차원에서 인상적인 표현 몇 개만 인용해봅니다.
│
“우리가 악에 철저히 저항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느새 악에 동조자가 되고 만다.”
“그것은 결국 우리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부터 ‘모든 차원의 죄악’과 싸워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각자가, 바로 ‘내’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실망과 증오보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아직은 작고 여리지만 분명 ‘우리 안에서 이미 싹트고 있는 새 세상’의 희망에 기초해 싸워야 한다.”
│
│
│
│
아래는 글쓴이가 인계해준 전문입니다.
│
│
(글쓴이는 참고로 지난번 글
https://www.facebook.com/CasuwonSemiSociety/photos/a.1135400043211641.1073741829.1135081706576808/1138765509541761/?type=3&theater
이 좀 더 일목요연할 수도 있다는 코멘트를 달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글이 신학생 전체의 의견과 마음을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라 말하면서,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이 마치 신학생 전체의 의견을 대변하는 것처럼 글을 기고하게 된 점에 대해서 민망하고 미안하다고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부득이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점에 대해서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한다고 했으며, 읽는 분들도 이러한 부족한 점들을 고려하여 읽어주시길 바란다고도 전했습니다.)
│
│
============================================
※ 우리신학연구소가 발간하는 『가톨릭평론』 7호, 43-50에 실린 전문.
│
│
우리가 정말 빛과 소금이라면
- 수원가톨릭대학교 신학생 시국선언에 관하여
│
1. 왜 신학생들까지 시국선언을 해야 했는가?
지난 2016년 10월 28일, 수원가톨릭대학교 총학생회는 현 시국과 관련하여 시국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후 전국의 다른 대신학교들에서도 시국선언이 이어졌다. 이를 두고 “왜 기도하고 공부해야 하는 신학생들까지 나서서 시국선언을 하였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질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우리 교리가 그런 것이기 때문”이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교회는 “인간전체를 구원하려는 그리스도의 의지”(『간추린 사회교리』 38항 참조)에 따라, “죄가 있을 때, 곧 사회 전역에 갖가지 방식으로 난무하고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불의와 폭력의 죄가 있을 때, 이를 고발할 의무가 있다”(81항)고 가르친다. 사실 굳이 여러 조항을 들 것도 없이, 그냥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마태 5,13.14)으로 부르셨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악에 저항할 의무가 충분히 설명된다. 우리가 정말 빛과 소금이라면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복음의 기쁨』 183항) 아니, 그럴 때일수록 더 “적극적으로 예언자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218항) 게다가 이처럼 세상이 어둡고 부패했다면, 이는 그동안 우리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했음을 확인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회적 부패에 그리스도인들은 ‘더 큰 책임’이 있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을 ‘우리 일’로 느끼고 책임감을 통감하며, 악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 시대를 위해 기도한다면, 그러한 기도가 가시적인 행동으로도 드러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야고 2,17 참조).
조금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보겠다. 사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한 사람에게서만 끝나지 않는다. 그 이전부터 “하느님 나라는 폭행을 당해왔다.”(마태 11,12 참조) 소수가 모든 것을 독점하며, 대다수 국민들은 부당한 생존경쟁에 내몰려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너부터 살아야지. 살아남으려면 돈과 권력뿐이야. 도태되는 이는 가치 없어”라고 끝없이 교육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자기 일을 끝낸 뒤에는 그저 ‘자신의 안위와 즐거움’으로 고개를 돌리기 바빴다. 물론 그만큼 우리네 삶이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도 벅차고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개돌림’ 덕분에 악의 구조가 유지되어올 수 있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건 악의 구조 안에서 악을 강요받고, 그에 따라 돈과 쾌락, 자기안위만을 우선시하게 된 세태 안에서, 도덕과 인간의 존엄, 성과 생명과 사랑의 가치는 처참히 짓밟히고 있다. 우리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이번 선언은 ‘원래 우리가 하는 일’인 영혼구원을 위한 일, 곧 ‘복음에 반대되는 모든 악에 대한 총체적 저항’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일 뿐이다. 진정 복음이 실현되기 위해서, 사회의 악의 구조가 혁파되고 우리 의식 자체가 변화되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우리들의 입장인 것이다.
또 우리가 시국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좀 더 구체적인 우리 신학생들의 마음을 통해서 얘기해보자면 이렇다. 그동안 우리 신학생들은 그리스도인의 이러한 소명 때문에, 신학원 안에서나마 사회현안들에 대해 토론하거나 우리 사회의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작은 노력들을 계속해왔다. 예를 들면, 세월호와 고(故) 백남기 임마누엘 형제님의 기억부스 설치, 세월호 추모미사와 기도봉헌, 세월호 유가족을 모시고 말씀을 청해 듣기, 부당해고를 당한 노동자들을 위한 작은 공연, 매주 금요일엔 ‘우리나라의 상처치유와 정의와 평화를 위한 지향’으로 그날의 모든 기도를 바치기, 방학이면 삼삼오오 모여 소녀상 및 광화문과 안산의 세월호 부스에 자주 방문하기, 촛불집회나 시국미사에 동참하기 등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같은 시민으로서, 같은 4·16세대로서, 우리 사회의 아픔과 문제에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동참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노력은, ‘사람보다 돈과 쾌락을, 공동선보다 개인의 안위만을 우선시하는 우리 의식과 사회의 악의 구조’에 맞서 오래전부터 외롭고 힘든 싸움을 계속하고 계신 분들을 생각할 때면 늘 ‘부족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늘 우리 마음엔 그분들께 대한 고마움과 죄송함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최근의 한 일화만 들어 이를 좀 더 부연해보겠다. 지난 2016년 10월 7일, 우리 수원가톨릭대학교 총학생회에서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활동(투쟁)에 작게나마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신학생들이 마련한 작은 성금과 기억책(Memorial book)을 4·16연대를 통해 유가족께 전달하고 유가족의 말씀을 청해 듣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에도 우리가 가장 깊이 통감했던 것은, 우리(교회)가 아직은 가난한 이들의 고통과 그들의 싸움에 충분히 함께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었다. 다른 누구를 이야기할 것 없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 그러했다는 사실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박근혜 게이트”를 통해 구체적으로 악이 드러났으니, 우리가 어떻게 잠자코 있을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직접적인 계기야 물론 이번 건이라 할 수 있지만, 그전부터 저들이 저질러온 - 가난한 이들을 고통 속에 울부짖게 만든 - 수많은 죄악이 이미 오래전에 우리 신학생들로 하여금 이 선언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10월 27일 임시학생회의를 통해 시국선언을 결의하고, 약 하루 동안 선언문을 작성하여, 학생들과 교수신부님들의 적극적인 지지 속에서 28일 금요일 시국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래서 말하자면, 이번 우리 신학생들의 선언은 “의로움에 주린 이들”(마태 5,6)의 투쟁에 ‘제때’에 동참하고자 사태를 예의주시하며 오랫동안 날을 벼려왔던 우리 신학생들의 입장과 의지를 즉각적으로 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선언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악의 구조,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우리 일상의 죄와 악습들에 보다 철저히 저항하지 못했었던 우리 자신에 대한 ‘회개의 노력’이었다.
2. 시국선언의 의도와 의미: “모든 악에 대한 전적인(full-time) 회개의 투쟁”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필자는 ‘일상의 죄’를 이야기하며 ‘우리의 회개’를 말하고 있다. 시국선언을 통해 시작하고 싶었던 담론은 바로 이것이다. 사실 저들의 죄악상에 대해서는 선언문에도 조금이나마 수록하였듯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또 그에 따라 모든 책임자를 끝까지 엄중처벌하고, 우리 사회의 악의 구조를 개혁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위로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일에 언론-재벌-관료-뿌리 깊은 매국세력들이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도 익히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은 미뤄왔던 대청소의 시작점일 뿐이다. 청산할 적폐가 많다. 다만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의 회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필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맞서고 있는 악이 그만큼 사회 곳곳, 우리 삶 곳곳에 뿌리내린 것이기 때문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의 일상 전체가 전환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부터 우리는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회개 없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우리 자신들의 회개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좀 더 살펴보자. 요컨대 그 이유는 우리 ‘일상의 작은 죄악(악습)’들이 우리 생각보다도 훨씬 더 깊이 이 ‘세상의 큰 죄악’들에 연관되어있고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회정치에 대한 무관심, 악덕기업 제품의 지속적 구매, 언론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 등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악을 키우는 우리 일상의 작은 악습들이다. 또 이런 측면뿐만 아니라, 내 안위만 우선하느라 이웃을 외면했을 때, 당장 손해가 없다고 거짓말과 부정을 묵인했을 때, 물질적 가치로 타인을 평가했을 때, 공동체의 문제 앞에서 자신은 뒷짐 지고 물러나 남 탓만 했을 때, 도덕적 가치들을 가벼이 했을 때 등 그런 순간들에도 우리는 우리 사회가 오늘 이 지경이 되도록 동조한 셈이다.
우리 일상의 이런 ‘작은 의식’들이 ‘세상의 큰 죄’를 지탱하고, 그것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은 단적으로 수년 전 MB의 당선만 봐도 알 수 있다. 그의 도덕적 문제를 당시 대다수가 알고 있었지만, 결국 우리 사회는 도덕보다 경제를 택했다. 경제라는 환상에 부패와 부도덕, 거짓말을 묵인해준 것이다. 오늘 이 사태는 이미 그때부터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가치를 더 우선시했는지는 돌아봐야 한다. 선택의 기로들에서, 우리는 도덕과 인간의 존엄, 공동선보다는 적잖이 돈과 개인의 안위를 선택해왔다. 지금에야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국민적 공감이 다시 형성되고 있지만, 그러나 이분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미지근함과 무관심 속에서 외롭게 싸워야만 했던가? “나만 아니면 돼”라는 천박하고 섬뜩한 고백이 우리 사회의 유행어가 됐을 때, 이미 우리 속내가 다 드러났던 게 아니겠는가? (물론 그분들이 지금까지 싸워올 수 있도록 함께 아파해주신 국민이 더 많았다.) 또 우리는 악인들이 끝까지 책임지게 만들지 않고 적당히 안일하게 지나쳐오기도 했다. 우리가 미뤄온 일들이 너무나 많다. 그런 식으로, 저들이 만들어온 헬조선의 게임 법칙에 따라주며, 저들의 준동을 방조해온 것은 우리였다. 우리가 악에 철저히 저항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느새 악에 동조자가 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 투쟁의 본질적인 차원이 드러난다. 우리가 정말로 정의를 원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악의 구조 자체를 혁파하길 원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우리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부터 ‘모든 차원의 죄악’과 싸워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각자가, 바로 ‘내’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변화를 원한다면, 자신도 이 시대의 악에 동조했음을 주님 앞에서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 자기 삶을 변화시키려 노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식으로 일상에서부터 ‘모든 악’에 정면으로 맞서며, 그 가운데 맞닥뜨리게 되는 자신의 나약함 또한 겸허히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렇게 자신의 그 ‘빈손’을 주님 앞에 펼쳐드릴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힘이 우리에게서 드러나고 참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악에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이 회개의 노력이 동반되어야만 우리의 노력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래서 계속 회개의 투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불의 앞에 마땅히 의노(義怒)하되 자신이 곧 교회고 세상이라는 책임의식을 갖고 자신 역시 변화되려 애써야 한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 사회 구조에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실망과 증오보다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아직은 작고 여리지만 분명 ‘우리 안에서 이미 싹트고 있는 새 세상’의 희망에 기초해 싸워야 한다. 불신과 실망과 증오의 불길이 커진 나머지, 우리 안의 신뢰와 희망과 사랑, 기쁨과 감사가 질식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국 “사랑의 문명”(『간추린 사회교리』 582항)을 향해 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들이 만들어온 헬조선의 돈과 권력의 게임 법칙에 저항함은 물론이고, 알량한 속임수들을 분별하고, 증오와 분열과 냉소와 절망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 우리의 투쟁은 보다 깊고 예리하며, 예외 없이 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3. 끝으로: “그리스도의 승리에 희망을 둔 굳건한 믿음으로 함께 싸워나감”
그런데 “전적으로”라는 말 앞에 우리는 작아진다. 바로 우리 자신이야말로 쉽게 죄에 걸려 넘어지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승리를 확신한다. 주님께서 승리하셨기 때문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가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인간적인 계산들에 관계없이, ‘이미 승리’하신 그분 품에서 우리도 승리할 것이다. 게다가 이 승리는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 성체 안에서 우리는 죄와 죽음을 이긴 그리스도의 승리를, 그분의 나라를 확인한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연약함과 비폭력을 닮은 촛불들에서, 진지하게 겸허한 성찰과 담론을 시작하는 서로의 눈빛에서, 우리는 이미 싹트기 시작한 새 세상을 어렴풋이 발견한다. 우리가 바라던 그 세상이 우리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 스스로가 서로에 대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에 대한) 신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가 희망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한, 결국은 우리가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없을 청산의 기회, 역사적으로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다.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뿌리내려온 악인만큼 한순간에 끝날 싸움이 아니다. 사실 “악마는 먹이를 노리는 사자처럼 세상 끝날까지 우리 곁을 배회할 것이다.”(1베드 5,8 참조)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굳건한 희망의 닻을 내리고, 성급하지 않고 담대하게, 늘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로 행동하고 행동으로 기도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지지로 연대해야 한다. 부족하지만, 우리 신학생들도 부단히 분투하면서 함께하며, 또 앞장설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
※ 이글은 우리신학연구소가 발간하는 『가톨릭평론』, 7호, 43-50에 실린 글입니다.
#시국선언 #신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