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1/2018
강좌 소개: 아우슈비츠, 윤리학
“증인은 통상 정의와 진실의 이름으로 증언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그녀의 말은 견고함과 충만함을 얻는다. 하지만 여기서 증언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증언이 결여하고 있는 것에 있다. 증언은 깊은 곳에 증언될 수 없는 무언가를, 살아남은 이에게서 자격을 내려놓게 하는 무언가를 담고 있다. ‘참된’ 증인, ‘온전한 증인’은 증언하지 않았고 증언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맨 밑바닥에 떨어졌던’ 사람들, 즉 이슬람교도들, 그러니까 익사한 자들이다.”-『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말한다는 것, 증언한다는 것은, 어떤 것은 철저히 탈주체화되고 말을 잃은 채 바닥에 가라앉는 한편 주체화된 어떤 것은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것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으면서 말하는 아찔아찔한 운동에 들어가는 것이다. 증언은 말을 못하는 자가 말을 하는 자에게 말하게 만드는 곳에서, 말을 하는 자가 자신의 말로 말함의 불가능성을 견디는 곳에서 발생하며, … 증언의 주체는 탈주체화를 증언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곧 감당이 안 되는 어떤 상황에 놓인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감당이 안 되는 것은 어떤 외부적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고유한 친밀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 따라서 여기서 ‘나’는 자신의 수동성에 의해, 가장 고유한 감성에 의해 압도되지만 이러한 박탈과 탈주체화는 이 ‘나’의 그 자신에게로의 극단적이고도 환원 불가능한 현전이기도 한 것이다. … 따라서 주체는 부끄러움 속에 자신의 탈주체화밖에는 다른 내용을 갖지 않으며, … 주체화이기도 하고 탈주체화이기도 한 이 이중 운동이 부끄러움이다.”-『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남은 자란 개념 속에서 증언의 아포리아는 메시아주의의 아포리아와 일치한다.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전 민족을 가리키거나 민족의 일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와 부분의 불일치를 가리키듯이, … 이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즉 증인들은 죽은 자도 아니고 살아남은 자도 아니며, 익사한 자도 아니고 구조된 자도 아니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 남은 것이다."-『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증인은 통상 진실을 말하는 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얻습니다. 하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은 수용소의 밑바닥까지 이르러보지 못한 사람들이며, 모두가 어느 정도 특권을 누렸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수용소를 끝까지 겪어낸 사람들, 그래서 온전한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무젤만(Muselmann)들 입니다.
무젤만은 수용소 안에서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죽음이 몸에 드리운 자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무젤만은 ‘이슬람교도'라는 뜻의 독일어 표현으로,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의 증언에 따르면 ‘멀리서 보면 꼭 아랍인들이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해서 이 말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살아 돌아온 자들이 예외라면 무젤만들은 수용소의 상례이자 중추를 이루고 있으며, 바로 이들이 보편적인 의미에서 증언을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육신의 죽음 이전에 이미 죽음이 시작된 인간으로, 가스를 들이마시기 벌써 전부터 관찰하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표현할 능력을 상실한 자들, 그래서 살아 돌아오지 못했거나 살아왔어도 자신이 경험한 온전한 진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증언에서 발견되는 이 공백 앞에서 아감벤은 증언과 증인 의미를 새롭게 사유하고자 합니다. 나아가 여하한의 도덕성과 인간성 자체가 의문에 부쳐지는 실험대인 무젤만 앞에서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다시 묻고자 합니다. 증인이란 누구일까요? 증인이 말한다는 것의 의미, 그리고 증인이 증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인간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런 물음들과 더불어 아감벤은 새로운 주체와 윤리의 영역을 펼쳐 보입니다. 이 강좌는 이와 같은 새로운 윤리학의 지대를 여러분과 함께 밟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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